요즘 각 정부 부처나 지자체의 조사 관련 이슈를 접하다 보면, ‘외로움’, ‘고립’, ‘돌봄’ 등의 사회적 케어와 관련된 단어가 자주 눈에 들어온다. 사회적 케어와 관련된 연구나 조사 프로젝트에 많이 참여하면서 나름 전문가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보니 절로 다른 사람이라면 스쳐 지나갈 단어라도 멈추어 들여다보게 된다.
작년에 출간했던 『외로움의 함정』과 『외로움을 소비하는 사회(공저)』도 어찌 보면 길을 가다가 잠시 멈추어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들의 외로움을 담아내려 한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얼마 전인 8월 말에 출판사 담당자가 뜻밖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출간하고 나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외로움의 함정』이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주관하는 도서 지원 사업인 ‘세종 도서’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출판 분야에는 문외한이다 보니 이게 얼마나 기뻐해야 할 상황인지 얼떨떨하던 참이었는데, 10권이 넘는 책을 출간한 한 지인이 이 소식을 알려주니 이렇게 말해주었다.
“와우, 대단하네요. 난 10권이 넘는 책을 출간했는데 아직 선정된 적이 없는데. 본인은 잘 모르겠지만 충분히 자랑하고 기뻐할 일이에요.”
그래서 오늘의 컬럼은 세종 도서 선정을 기념해서 외로움에 대해, 특히 외로움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함께 이야기를 나눠 보려고 한다. 퇴행과 관련해서 말이다.
외롭다는 감정은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정서이기 때문에 우리가 알기 쉬운 구체적인 감정과 동반해서 느끼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슬픔을 느낄 때, 슬픔과 함께 외로움을 느낀다. 두려울 때, 두려움과 함께 외로움을 느낀다. 허무할 때 허무함과 함께 외로움을 느낀다. 내가 슬프거나 두렵거나 허무할 때, 내 곁에 나를 깊이 이해해 주는 사람이 함께 한다면 그런 감정들은 잠시 머물다 지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나눌 사람이 없는 고립 상태라면 더 슬프고 두렵고 허무하다고 느낄 것이다.
외로움은 우울과 불안을 동반하는 경향이 있다. 외로운 사람은 다 우울하다든지, 우울한 사람은 다 외롭다든지 하는 상관관계가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외로움은 우울증의 분명한 위험 요소이다.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회불안도 외로움과의 직접적인 인과 관계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관련은 있다. 이처럼 외로움으로 인한 우울과 사회불안의 공통적인 증상 중 하나는 삶에 대한 의욕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회사에 가기 싫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는 심리는 누구든지 겪어봤을 것이다. 이런 마음이 들 때면, ‘왜 모두가 당연한 것처럼 학교에 가거나 회사에 가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떠오른다.
어렸을 때 개미를 관찰하는 버릇이 있었다. 개미라는 것은 매우 기묘한 생물이다. 하루 종일 일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 생물은 개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의 개나 고양이는 시간 대부분을 낮잠 자는 데에 보내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왜, 개나 고양이처럼 살 수 있는 생물과 개미나 사람처럼 살아가는 생물이 있을까? 인간의 행동도 개미와 마찬가지로 다른 생물종의 입장에서 관찰하면 아마 굉장히 기묘하고 흥미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입버릇처럼 모두가 ‘시간이 없어서’라고 말하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시간이 부족한 것일까? 지구라도 다시 건설할 셈인가? 회사나 학교에 ‘가고 싶은데 안 되는’ 상태일 때, 그때 바로 느꼈던 감정은 ‘억울함’이었다.
도대체 누가 왜 인간이라는 것은 선천적으로 정상이면 학교나 회사에 가는 것이라고 정했단 말인가? 하필이면 우리는 왜 그런 인간으로 태어난 것일까? 하는 억울한 심정 말이다. 그 당시 심리 상태를 변명해 준 것이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 나오는 다음 문장이었다.
무대 장치가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아침에 기상, 전차로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화수목금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3, 29쪽)
가정, 학교, 직장 등, 각각의 ‘무대’를 밖에서 바라보는 감각에 빠지는 순간이 있다. 자신이 해내고 있는 일상의 루틴이 역겹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왜 나는 여기에 있는 것일까? 지금부터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어차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인데, 따지고 보면 분명 사는 것 자체가 부조리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서 인간은 그저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인간들은 용케도 그 부조리한 것들을 묵살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이다. 카뮈는 우리에게 좀 더 생각하고, 더 나아가 의식적인 행동을 기대했을지 모르나, 결근이나 결석을 하고 나서 억울함을 풀기 위해 대단한 철학적 고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고작해야 실컷 늦잠을 자거나 게으름을 피우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지나고 억울함은 사라져 버린다.
의식적인 게으름은 허비하는 시간이 아니다. 열정을 갖고 꿈을 이루기 위해 달리기만 하는 사람들은 잠시라도 쉬면 큰일이 나는 줄 안다. 쉬지 않고 성과에 매달리다 보면, 외부로부터의 강제적인 힘에 의해 멈출 수밖에 없는 때가 찾아온다. 뜻밖의 장애물을 만나거나 조직에서 밀려날 때 우리는 좌절하고 낙담한 나머지 자신의 모든 재능마저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게 아닌지 물어봐야 한다.
알고 보면, 우리의 능력은 세상의 평가보다 더 높은 곳에 있기도 하다. 자신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편안한 상태로 돌아가 쉬어 보면 답을 찾을 때가 있다.
외로움의 단계가 시작될 때, 삶의 의욕이 떨어지고 무기력이 나를 집어삼키려고 하는 것이 아닌지 경계해야 한다. 바깥 세계와 관계를 잘 맺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내면 세계를 살펴주어야 한다. 무지한 상태에서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는 삶과 내 마음의 움직임을 아는 상태에서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삶은 차이가 있다.
마음이 잘 길들여진 사람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을 놓지 않는다. 지금처럼 바쁘게 사는 것이 정상처럼 되어 있는 시대에 나 혼자만 도태되는 느낌과 함께 무기력감이 밀려올 때는 의도적으로 나태해지는 것도 필요하다. 누구라도 큰 사건을 겪거나 매우 피곤하거나 어떤 특수한 환경에 놓이게 되면 지각, 사고, 감정, 행동을 지휘하는 마음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지각은 우리에게 어떤 것의 존재 여부를 알려주고, 사고는 그 존재하는 것의 정체를 알려주며, 감정은 그 존재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알려준다.
하지만 그러한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인지가 왜곡되어 평소에는 생각하지 않은 일들을 상상하거나 생소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이때 위기에 처한 자아를 구하기 위해 퇴행(regression)이라는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가 등장한다.
퇴행은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자아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일시적, 혹은 장기적으로 아이로 돌아가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퇴행을 발견한 것은 정신분석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이다.
프로이트는 사람은 누구라도 마음에 유아기의 과거가 남아 있어, 힘든 상황에 놓이면 퇴행이 출현하는 것을 발견했다. 퇴행은 병적인 퇴행과 자아를 위한 건강한 퇴행으로 나눈다. 퇴행하는 발달 단계에 따라 발현되는 정신 증상이 다르고, 흔히 구강기로 퇴행하면 우울증, 항문기로 퇴행하면 강박신경증, 남근기로 퇴행하면 히스테리라는 정신 증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노래방에 가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것. 이것은 구강기로의 건강한 퇴행이다. 무의식 속에서는 젖을 먹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아이로 돌아가는 것이다. 좋아하는 모형을 수집하며 즐기는 것. 이것은 항문기로의 건강한 퇴행이다. 퇴행은 모든 인간에게 나타나는 정신 현상이며, 일상생활 속에서 퇴행을 무의식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퇴행의 대표적인 상태는 수면이며, 누구나 하루에 한 번은 가장 원시적인 상태인 수면으로 돌아가 피로를 푼다.
누구나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성장 과정에는 즐거운 시기도 있고 힘든 시기도 있다. 퇴행을 하여 괴로움의 원점을 확인하듯, 그 고통의 씨앗이 뿌려진 시기까지 돌아갈 때와, 이와 반대로 즐거웠던 시기까지 돌아갈 때가 있다. 즐거웠던 시기, 편안했던 시기로 돌아갔을 때는 마음의 에너지를 충전하고 다시 출발하기가 쉽다. 그러나 고통의 시기로 돌아가 정신 상태가 고착되면 재출발이 어렵다.
인간은 나선형을 그리며 성장한다. 일시적인 퇴행은 다음 성장을 위한 삐걱거림이다. 서두르지 말고 힘을 비축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다만, 적절한 시기에 다시 성장을 위해 일어서야 한다. 성장을 위한 충전을 위해서는 일시적인 퇴행이 필요하고, 일부러라도 ‘퇴행 의식’을 치루는 것은 도움이 된다. 이와 관련한 필자의 일화를 소개해 본다.
딸아이가 고3이었을 때, 수시로 시행되는 모의고사나 각종 시험이 있는 날이면, 시험 날을 전후로 유난스럽게 어리광을 부렸다. 갑자기 갓난아이가 된 것처럼 안기기도 하고, 내 옆에 누워 엄마와 함께 자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공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고3이니 나름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고3 내내 그런 증세가 보이면, 나는 소파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고3 시절에 유난히 몸집이 커진 딸아이를 어린애처럼 안고, 퇴행 의식인 ‘퇴행 충전’ 시간을 갖곤 했다. ‘퇴행 충전’ 시간의 커뮤니케이션 랭귀지는 ‘옹알이’로 정했다. 딸아이는 혀 짧은 소리를 내며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어린 아기로 퇴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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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해주는 말들은 주로 갓난아기였을 때의 귀여웠던 모습들이나, 학교가 그렇게 가기 싫으면 엄마가 대신 교복을 입고 이름표를 달고 학교에 가겠다느니, 적성에 안 맞는 공부를 하느라 얼마나 힘들겠냐며 위로하기도 하고, 우리 딸 얼굴도 이쁜데 공부까지 잘하면 큰일이라는 둥, 말도 안 되는 장난을 치며 20분에서 30분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면 다리도 저려 오고, 딸아이도 안겨 있는 자세가 갑갑한지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면 나는 로봇청소기에서 나오는 음성과 똑같이 “충전이 끝났습니다!”를 외치며 딸아이를 밀쳐내고 서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딸아이는 지금 서른 살이 되었지만, 지금도 가끔 그 시절의 ‘퇴행 충전’을 요구한다.
현대의 직장인들은 하루 종일 회사 일로 시달리다 집에 오면 뒹굴뒹굴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파와 한 몸이 되어 텔레비전만 본다. 이것도 퇴행해서 긴장을 풀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퇴행은 에너지를 보급해 주어 활력을 되찾아준다. 이때 필요한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즉 마음 편하게 퇴행할 수 있는 사람과 장소, 시간이다. 이 3가지를 다 갖추고 퇴행 의식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한 가지라도 있으면 도움이 된다. 긴장에서 벗어나 릴렉스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있는지, 집이 아니라면 카페나 도서관, 공원, 자동차 안이라도 좋다.
일상으로 바쁜 우리들이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퇴행 충전은 혼자서 멍하니 있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자신이 편안하다고 생각하는 공간에서 정말 아무 생각없이, 또는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그냥 흘러가게 놔두면서 잠시 앉아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인간에게 퇴행이란 복잡한 생각을 가지기 전,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었던, 마치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은 나와는 아무 상관 없다고 느끼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조금 무책임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카페에 혼자 편안히 앉아 있다면 오롯이 커피의 향을 즐기고, 어둑해지는 창밖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오가는 사람의 발 끝을 바라보면 세상의 분산함과 거리를 두어보고, 카페에 흐르는 뭔가 모를 느리고 차분한 공기를 폐에 담아보는 것도 멋진 퇴행 충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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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우리에게는 잠깐이라도 한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지, 단 몇십 분 만이라도 잠시 일상에서 떠나 산책하거나 음악을 들으며 에너지를 충전하는 루틴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편하게 수다를 떨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꼭 친밀한 관계가 아니더라도 나눌 대화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 즐겁고 유쾌한 퇴행 충전도 가능할 것이다.
퇴행할 수 있는 장소, 시간, 사람이 동시에 있으면 가장 효과적이지만, 이 중 한 가지라도 평소에 만들어 놓고 자신이 지금 퇴행 의식을 통해 충전이 필요한 상태라고 인식하고 퇴행할 수 있다면 무기력으로 인한 외로움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인생에서는 생산을 위해서 충전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지만, 반대로 제대로 충전이 되어야 생산도 가능하다고 가치관을 바꾸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나약한 존재이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고, 성장하는 과정은 물론 성장한 후에도 의지할 곳이 필요하다. 특별히 원대한 꿈을 꾸며 강한 의지를 품고 대단한 노력을 하려고 해도 한순간에 무참히 무너질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고난과 역경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고난과 역경은 하늘의 몫이고, 단지 그런 시련이 닥쳤을 때 어떻게 겪어내느냐만이 사람의 몫이다. 이때 묵묵히 자신을 믿고 지지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 시간들을 살아낼 수 있다. 자신의 상태가 어떤 상황인지를 평상시에 의식적으로 판단하여, 이에 대한 나만의 충전 방식을 어떻게 만들지 생각해 보자.
_ 이완정_『외로움의 함정』 저자/(주)조사연구컨설팅#올림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