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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Lounge_19] 과학과 종교, 그리고 그사이 어딘가의 조사

  •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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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서치 업무를 오래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이상한 질문 하나가 마음속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믿고 있는 걸까?”라는.


설문지를 설계하고, 표본을 추출하고, 통계 프로그램에 데이터를 돌리고, 유의확률을 확인하는 이 모든 과정은 분명 과학의 얼굴을 하고 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p값이 0.05보다 작으면 유의미하다고 판단하고, 신뢰구간이 좁을수록 우리는 더 확신을 가진다. 이 정도면 충분히 객관적이지 않은가.

그런데 조사보고서의 마지막 장, 그 결론 부분을 쓸 때가 되면 이상하게도 손끝이 머뭇거린다. 데이터는 분명 A라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데, 그것이 정말 ‘왜’ 그런지, 이 숫자 뒤에 어떤 사람의 마음이 있었는지를 설명하려는 순간, 우리는 더이상 순수한 관찰자가 아니게 된다. 해석하는 사람이 되고,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 되고, 어쩌면 이야기를 짓는 사람이 된다.

그 순간 리서처는 과학자의 자리에서 슬며시 내려와, 사제와 비슷한 자리에 서게 된다. 그래서 ‘과학과 종교 사이에, 내가 서 있는 조사라는 영역은 그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라는 시답지 않는 생각을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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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I 생성 이미지


과학은 재현 가능성을 생명으로 삼는다.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실험을 하면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한다. 과학은 증명을 요구하고, 반증 가능성을 열어두며, 언제든 더 나은 증거가 나타나면 기존의 결론을 미련 없이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과학의 미덕은 겸손함이다. “지금까지의 근거로는 이렇다.”라고 말할 뿐, “영원히 이렇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반면 종교는 증명이 아니라 믿음을 요구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신뢰하고, 확인할 수 없는 것을 확인된 것처럼 살아간다. 종교의 힘은 여기서 나온다. 완벽한 증거 없이도 삶의 방향을 정하고, 흔들리는 순간에도 붙잡을 무언가를 준다는 것.

조사는 이 둘 사이 어디쯤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방법론은 과학을 지향한다. 표본의 대표성을 따지고, 척도의 신뢰도와 타당도를 검증하고, 통계적 오차를 계산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조사가 하는 일은 결국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가?”, “사람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서사는, 아무리 정교한 통계로 감싸더라도, 결국 누군가의 해석이라는 인간의 손을 거쳐야 완성된다. 그리고 이런 서사는 설문지를 설계하는 순간, 이미 믿음으로 시작된다

조사가 과학이라고 믿고 싶은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저 데이터를 수집할 뿐이다. 해석은 그다음 문제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설문지의 첫 문항을 만드는 순간부터 리서처는 이미 어떤 가정을 세우고 있다. “이 질문이 사람들의 진짜 생각을 끌어낼 것이다!”라는 가정, “이 척도가 우리가 측정하고자 하는 개념을 정확히 담아낼 것이다!”라는 가정. 그러나 이 가정들은 검증되기 전까지는 그저 믿음일 뿐이다.

표본을 설계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전체 모집단을 대표할 수 있다고 믿는 몇 백 명, 혹은 몇 천 명을 선택한다. 그 선택이 실제로 전체를 대표하는지는 그 조사가 끝나기 전까지 아무도 완벽하게 알 수 없다. 우리는 그저 통계학이 가르쳐준 방법을 따르며, 그 방법이 우리를 진실 가까이 데려다줄 것이라고 믿고 그 여정에 오른다.

이것은 마치 기도와 닮았다. 정확한 절차를 따르고, 검증된 방법을 사용하고, 선배들이 남긴 지혜를 참고하지만, 결국 우리가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는 채로 시작한다. 리서처는 매번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이 작은 믿음의 도약을 거친다.


그렇게 해서 얻어낸 많은 숫자, 그 자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만족도 3.8점’이라는 숫자는 그저 존재할 뿐이다. 이것이 높은 것인지 낮은 것인지, 작년보다 좋아진 것인지 나빠진 것인지, 경쟁사 대비 우위인지 열위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전적으로 사람의 몫이다.

여기서 리서처는 필연적으로 해석자가 된다. 그리고 해석에는 언제나 관점이 개입한다. 어떤 맥락을 선택해서 비교할 것인가, 어떤 세그먼트를 강조할 것인가, 어떤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울 것인가. 같은 데이터를 가지고도 완전히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두 명의 리서처가 있을 수 있다. 둘 다 틀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저 다른 창을 통해 같은 풍경을 바라본 것뿐이다.

이것이 바로 조사라는 업무의 흥미로운 지점이다. 우리는 객관성을 추구하는 도구를 사용하지만, 그 도구가 만들어낸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는 마지막 순간, 우리는 결국 하나의 관점,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믿음을 선택해서 전달하게 된다. 

완전히 중립적인 보고서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강조하고 무엇을 생략하는지, 그 선택 자체가 이미 하나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조사를 의뢰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그들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종종 정확한 데이터가 아니라, 확신이라는 것이다.

신제품을 출시하기 전, 경영진은 데이터를 보고 싶어 한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자신이 내리려는 결정이 옳다는 것을 데이터를 통해 확인받고 싶어 한다. 이미 마음속으로는 방향을 정해놓고, 조사 결과가 그 방향에 힘을 실어주기를 기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조사 결과가 예상과 다르게 나오면, 사람들은 종종 방법론부터 의심한다. “표본이 잘못된 거 아닌가?”, “질문이 편향된 거 아닌가?”라면서.

우리는 우리가 이미 믿고 있는 것을 확인해주는 증거는 쉽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반박하는 증거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심리학은 이를 확증 편향이라 부른다. 조사가 아무리 과학적 방법론을 따른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은 여전히 종교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렇기에 좋은 리서처는 단순히 숫자를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숫자가 만들어내는 불편함을 견뎌내도록 돕는 사람이어야 한다. 데이터가 가리키는 방향을, 클라이언트가 원하지 않더라도 정직하게 전달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과학의 세계에서 우리는 오차를 인정한다. 신뢰구간, 표준오차, 유의수준. 이 모든 개념은 결국 “우리는 완벽하게 알 수 없다!”라는 겸허한 고백이다.

95% 신뢰수준이라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100번 중 5번은 우리가 틀릴 수 있다는 뜻이다. 완벽한 확신은 애초에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 속에서 판단을 내려야 하고, 그 판단에 책임을 져야 한다.

종교인들이 완전한 증거 없이도 삶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며 살아가듯, 리서처들도 완전한 확신 없이 결론을 내리고 그것을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리서처는 그 불확실성의 크기를 최대한 정직하게 계량하고 밝히려 애쓴다는 것이다. “이만큼은 확신하고, 이만큼은 확신하지 못한다.”라고 스스로 고백하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조사라는 일이 가진 독특한 윤리다.


조사가 가장 종교에 가까워지는 순간은 아마도 트렌드를 예측할 때일 것이다. 소비자 행동의 변화를 감지하고, 다가올 시장의 흐름을 짚어내고, 앞으로 이런 방향으로 갈 것이라 말하는 순간, 리서처는 예언자의 역할을 떠맡게 된다.

우리는 과거의 데이터와 현재의 패턴을 근거로 미래를 이야기하지만, 미래는 본질적으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다. 아무리 정교한 모델을 사용해도, 미래를 확실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번 보고서의 마지막 페이지에 ‘향후 전망’이라는 장을 쓴다. 이는 신중한 추론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믿음의 선언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예측이 때때로 스스로 실현되는 예언이 된다는 점이다. 어떤 트렌드가 온다고 발표되면, 기업들은 그 트렌드에 맞춰 제품을 만들고 마케팅을 하며, 결과적으로 그 트렌드가 실제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데이터가 미래를 예측한 것인지, 그 예측이 미래를 만든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지는 지점. 여기서 조사는 관찰의 과학을 넘어 창조의 영역에 발을 들이게 된다.


여기까지 읽으면 혹시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럼 조사라는 게 결국 다 주관적인 것 아닌가. 믿을 게 못 되는 것 아닌가?”라고.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조사가 완전한 종교가 아니라 과학의 방법론을 그토록 철저히 따르려 하는 이유는, 바로 그 주관성의 위험을 알기 때문이다. 표본을 무작위로 추출하고, 척도를 검증하고, 통계적 유의성을 확인하는 이 모든 절차는 우리의 주관이 함부로 날뛰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안전장치다.

과학적 방법론이 없다면, 조사는 그저 리서처 개인의 직관과 편견의 나열이 될 뿐이다. 우리가 데이터를 신뢰하는 이유는, 데이터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데이터가 우리의 편견을 견제하는 최소한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숫자는 우리에게 “네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는 건 아닌지”를 끊임없이 되묻는 거울과 같다.

그러니 리서처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과 종교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둘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균형을 잡는 능력이다. 데이터 앞에서는 최대한 겸손한 과학자가 되어야 하고, 그 데이터를 세상에 의미 있는 이야기로 풀어낼 때는 신중한 해석자, 어쩌면 조심스러운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그럼 좋은 리서처란 어떤 사람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좋은 리서처는 회의론자이면서 동시에 신자이어야 한다고.

회의론자로서, 그는 자신의 첫 가설을 의심한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왔을 때 오히려 더 꼼꼼히 검토한다. “혹시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는 건 아닌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데이터가 말끔하게 자신의 예상과 맞아떨어질수록 더 의심스러운 눈으로 다시 살펴본다.

동시에 신자로서, 그는 조사라는 과정 자체를 믿는다. 완벽하지 않은 방법론일지라도, 정직하게 수행된 조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믿는다. 불확실성 속에서도 최선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 리서처의 책무라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목소리에는 들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평범한 사람들의 답변 하나하나가 모여 세상의 흐름을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이 믿음이 없다면 조사라는 일은 그저 지루한 통계 작업에 머물고 만다. 그러나 이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매번 새로운 설문지를 만들고, 낯선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고, 데이터를 정리하며 밤을 새우고, 마침내 하나의 결론을 세상에 내놓는 이 모든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다.


조사보고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나는 여전히 지금도 같은 질문을 떠올린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믿고 있는 걸까?”라는.

그 답은 언제나 조금씩 다르다. 어떤 프로젝트에서는 숫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었고, 어떤 프로젝트에서는 데이터 너머의 여백을 조심스럽게 채워야 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늘 같았다. 우리는 과학의 도구를 손에 쥐고, 종교의 마음으로 그 결과를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

조사란 결국 그런 일이다. 객관을 향해 최선을 다해 다가가지만, 마지막 한 걸음은 언제나 사람의 몫으로 남는 일. 증거와 믿음, 관찰과 해석, 회의와 신뢰가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함께 걸어가는 여정. 그 사이 어딘가에서, 오늘도 우리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목소리들을 모아 하나의 이야기를 짓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세상의 작은 결정 하나를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주기를, 오늘도 조용히 믿어본다.



_ 박규상_사회정보학 박사/(주)조사연구컨설팅#올림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