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했던 시기가 있었다. 대학교 4학년 때 즈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로 한참 광고를 포함한 마케팅 전반의 관심이 하늘을 찌를 시기여서 많은 친구가 광고대행사를 목표로 취업 준비를 하기도 했다. 대학원에서 소비자 심리학을 전공하게 된 것도 그런 연유였다.
그런데 정작 광고와 관련된 소비자 심리학에 관한 정보나 뉴스를 손에 넣을 방법이 별로 없어서 답답해하던 차에 눈에 들어온 것이 각 광고대행사가 발행하는 사보였다. 당시 사보에는 해외 연구도 소개되고 광고 사례도 많이 담겨있는 그야말로 정보의 보고였다. 하지만 한정된 부수만 발간해서 배포했기 때문에 쉽게 접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꾀를 내었다. 홍보실의 주소를 알아내서, “광고를 전공하는 박사 과정 학생인데, 귀사의 사보에 관심이 많고 귀사의 광고를 사례로 논문을 쓰고 싶습니다. 혹시 가능하다면 직접 사보를 받아보고 싶은데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내용을 담은 장문의 편지를 써서 모든 광고대행사에 보냈다. 크게 기대를 안 하면서.
그런데 의외로 국내 최대 광고대행사를 비롯해서 모두 7개의 광고대행사에서 사보를 집으로 보내주기 시작했다. 학부 4학년 여름방학 즈음부터 시작해서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원 석사 과정을 졸업할 때까지 거의 5년간, 집에는 그렇게 차곡차곡 사보가 쌓여갔다. 학생이 개인적으로 사보를 받아보는 경우가 없으니, 잘난 척하면서 친구들에게 빌려주기도 하던 기억도 있다.
지금은 광고와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고 있지만, 광고회사의 동향이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에 나오면 읽어보는 걸 보면 미련이 조금은 남아있나 보다.
이번 컬럼에서는 리서치 라운지 12회차에서 다룬 ‘합성소비자’와 관련 내용을 찾아보다가 우연히 만난 일본 2위의 광고대행사인 ‘하쿠호도(博報堂)’의 기사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2025년 11월, 하쿠호도 그룹은 독자적으로 보유한 풍부한 생활자 데이터를 바탕으로 AI를 활용하여 복수의 생활자를 재현하고, 이들 생활자들과 언제라도 대화할 수 있는 ‘Evidence Based 버추얼 생활자(Virtual Seikatu-sha)’를 개발해, 글로벌 차원에서 하쿠호도 그룹의 전사원이 이용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발표했다.
하쿠호도 그룹이 버추얼 생활자를 개발한 이유로는, 현재 AI의 활용이 한층 더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그룹 차원에서 ‘Human-Centered AI’라는 기치 아래 인간 중심의 AI 활용과 AI에 의한 인간의 창조성 확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쿠호도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그룹의 모든 사원이 생활자의 생각을 근간으로 하는 발상을 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고, 2024년부터는 AI를 활용하여 생활자 발상을 보다 철저하고 깊게 하기 위해 ‘생활자 발상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버추얼 생활자의 개발을 진행해왔다.
버추얼 생활자는 2024년 3월에 프로토타입을 발표한 이래, 다양한 개량이나 실증 실험을 실시하면서, 보다 현실에 가까운 생활자의 생성과 지원되는 발상의 질을 올리기 위한 개발을 실시했다. 그 결과 이번에 개발한 Evidence Based 버추얼 생활자는 성별이나 연령 등의 속성 데이터뿐만 아니라 취미, 기호 등의 심리 데이터, 그리고 이용하고 있는 웹사이트 등의 행동 데이터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데이터는 하쿠호도 그룹의 독자적인 20만 건의 대규모 조사 패널인 Querida 패널의 데이터로 확보할 수 있었다. Querida 패널은 하쿠호도 그룹이 1년에 한 번, 20만 ID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대규모 조사를 바탕으로 한 데이터를 말한다. 데모 그래픽 정보 외에, 생활에 관한 질문, 미디어의 접촉이나 상품 구입에 관한 질문이 포함되면, 인터넷상의 행동 데이터와도 연결 가능하여 어떤 정보를 열람했는지, 어떤 정보에 흥미를 보였는지에 대해도 알 수 있다.
생활자 발상 플랫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오랜 세월 축적해 온 이런 독자적인 생활자 데이터라 할 수 있다.
하쿠호도 그룹은 버추얼 생활자를 업무에 활용함에 따라, 현실에서 살아있는 생활자를 재현할 수 있어 업무나 마케팅 과제에 맞춘 가상 생활자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에 따라 사원들은 자신의 아이디어와 의문을 바탕으로 버추얼 생활자와의 질 높은 대화를 통해 새로운 질문과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버추얼 생활자 페르소나(위)와 대화형UI(아래) 이미지>

버추얼 생활자 시스템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버추얼 생활자와 상시 대화 가능한 공동창조형(Co-creation) UI를 활용한다는 점이다. 공동창조는 기업이 고객(또는 이해관계자)과 함께 문제를 정의하고 솔루션을 만들며, 고객 경험을 중심으로 가치를 창출하는 접근 방식을 말한다.
이 시스템에서는 데이터 기반의 타겟 분석으로 얻은 페르소나 정보를 입력하면 AI가 몇 번의 클릭만으로 버추얼 생활자를 생성한다. 따라서 전문적인 프롬프트 작성은 불필요하며, 단시간에 다수를 생성할 수 있다.
버추얼 생활자를 동시에 여러 명 설정하여 채팅 형식의 UI로 대화할 수도 있다. 하나의 질문에 대해 찬성이나 반대 등 일방적인 의견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각도에서의 의견을 얻어 사원의 창의성을 자극할 수 있기도 하다.
이미지나 영상을 제시하여 의견을 구할 수도 있으므로, 사전에 커뮤니케이션 전략에 대해 구체적인 평가를 얻을 수도 있다. 게다가 타겟을 정확히 포착한 제안이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 시스템이 글로벌 차원으로 도입됨에 따라 하쿠호도 그룹은 그동안 추구해왔던 ‘생활자 발상법’을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게 되리라 기대하고 있다.
버추얼 생활자와의 대화 과정에서 하쿠호도 그룹이 오랜 기간 축적해 온 생활자의 심층 심리와 인사이트를 도출하기 위한 생활자 발상법을 활용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래더링(Laddering) 기법’ 등을 적용하면 AI가 지정된 프로세스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답변을 해준다.
하쿠호도 그룹은 2024년 6월 미디어 비즈니스 및 디지털 마케팅 영역은 물론, 크리에이티브 제작, 판촉·CRM(고객 관계 관리), 유통 영역까지 원스톱으로 통합·관리가능한 통합마케팅플랫폼인 ‘CREATIVITY ENGINE BLOOM’의 개발을 발표했는데, 버추얼 생활자가 이 플랫폼의 핵심 기능이 자리하면 자사의 모든 업무 영역과 연동되면 이전보다 더 깊이 있게 생활자의 심리를 포착하는 마케팅 실행과 전략 입안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참고로 CREATIVITY ENGINE BLOOM은 STRATEGY BLOOM(마케팅 전략 수립 지원;시장 구조 가시화, 타겟 설정, KPI 책정 등), MEDIA BLOOM(미디어 효과 극대화; TV와 디지털을 조합한 최적화). CREATIVE BLOOM(크리에이티브 제작 지원;AI를 활용한 평가 및 자동 생성), COMMERCE BLOOM(마케팅 전략 입안 지원; 구매 데이터와 EC 플랫폼 연동), ENGAGEMENT BLOOM(고객과의 관계 구축 지원; SFA/MA 툴 연동, LTV 향상), 생활자 DATA PLATFORM(그룹 독자 데이터와 외부 데이터를 일원 관리하는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음)
인터넷에 올라온 하쿠호도 그룹의 공개 보도자료 등을 살펴보면 버추얼 생활자를 활용하여 이미 여러 캠페인에서 전략 설계 단계를 눈에 띄게 변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사례로 ‘Advertising Week Asia 2025’ 세션에서 하쿠호도가 발표한 내용을 보면, 글로벌 자동차 브랜드가 태국에서 새 SUV를 출시하면서 누구를 핵심 타겟으로 삼고 어떤 커뮤니케이션 설계를 해야 할지 정의하는 일에 버추얼 생활자를 활용했다고 한다.
하쿠호도 팀은 클라이언트가 보유한 정량·정성 데이터에서 타겟 후보를 추려 20~30개의 페르소나를 정의하고, 이 프로파일을 기반으로 태국의 다양한 라이프스타일과 가치관을 지닌 버추얼 생활자를 생성하여, 이들 버추얼 생활자들 각자와 대화를 반복하면서 SUV에 대한 기대, 불만, 생활 문맥 상의 포지셔닝을 탐색했다.
그리고 각 버추얼 생활자에게 “어떤 점이 마음에 드는지 또는 불안한지?”를 한 명씩 깊이 물어보면서 긍정·부정 포인트를 정리하여, 이렇게 뽑힌 힌트들을 바탕으로 캠페인의 핵심 콘셉트를 다시 규정하고 타겟 세그멘트별 서브 메시지 방향까지 세분화했다. 버추얼 생활자를 활용해서 인사이트를 발굴하고 콘셉트를 재정립한 것이다.
이후 도출된 콘셉트로 여러 버전의 크리에이티브를 제작한 뒤, 버추얼 생활자에게 각각 노출해 “어떤 버전이 더 와닿는지” 정성 피드백을 수집하고, 실제 출시 후를 가정해서 매장에서 딜러 매장에서 고객과 판매원이 나눌 대화나 오너가 SNS에 올릴 리뷰와 댓글 흐름까지 시뮬레이션하여, 캠페인 메시지와 세일즈 토크의 불일치 지점을 미리 발견하고 조정하였다.
하쿠호도 그룹은 버추얼 생활자를 도입하면서 마케팅 전략이 세 가지 방향에서 크게 바뀌었다고 설명한다.
우선 타겟 정의의 방식 자체가 ‘표적’에서 ‘인물’로 이동하였다. 기존에는 연령·소득·가족 구성 등으로 정의된 세그먼트에서, “어떤 하루를 사는 사람인가, 어떤 도로를 누가, 누구와 달리는가”까지 포함한 생활 장면 기반 타깃 정의로 전환되었다.
메시지 설계 면에서는 ‘기능 설명’보다 ‘생활자 내러티브’ 비중이 강화되었다.
버추얼 생활자들에게서 뽑힌 말들은, “연비가 좋다”보다 “주말에 아이를 태우고 교외로 나갈 때 안심되는 차” 같은 스토리형 표현이 많았고, 이 결과, 캠페인 메시지도 스펙 나열 중심에서 생활 맥락 속 장면과 감정에 초점을 둔 내러티브로 재구성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론칭 전 단계에서의 버추얼 생활자들과의 대화에서 도출된 ‘불안 요소’(가격 민감도, 유지비, 사이즈 걱정 등)를 사전에 정리하고 리스크를 인지할 수 있어 마케팅 전략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하쿠호도 그룹은 평가하고 있다.
버추얼 생활자의 이야기를 찾아보면서 드는 생각은 결국 조사와 마케팅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질문인 “사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이다. 버추얼 생활자는 어쩌면 이제 단순히 소비자를 분류하고 예측하는 도구를 넘어, 사람의 생활과 감정, 판단의 맥락을 보다 입체적으로 읽어내려는 시도라는 생각이 든다.
이는 하쿠호도 그룹이 오랫동안 사람을 ‘소비자’가 아니라 ‘생활자’로 바라보는 관점을 축적해 왔고, 소비 행위만이 아니라 그 행위가 놓인 일상, 관계, 감정, 가치관까지 함께 읽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한다.
버추얼 생활자 개념의 핵심은 단순한 페르소나 생성이 아니다. 버추얼 생활자는 특정 연령대나 성별을 대표하는 상징적 캐릭터가 아니라, 실제 생활자의 데이터와 맥락을 반영해 구성된 반응형 모델이기 때문이다.
질문을 던지면 응답하고, 맥락을 바꾸면 다른 반응을 보이며, 여러 차례의 대화를 통해 보다 깊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으니, 기존의 설문이나 인터뷰가 포착하기 어려웠던 미묘한 감정의 결을 탐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버추얼 생활자는 조사 업무를 대체하는 도구가 아니라, 조사 회사가 가진 해석 능력과 현장 감각을 더 높은 수준으로 확장할 수 있는 계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버추얼 생활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리서치가 지녀야 하는 앞으로의 경쟁력은 이제 “얼마나 많이 아는가”보다 “얼마나 깊게 읽어내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_ 박규상_사회정보학 박사/(주)조사연구컨설팅#올림 전문위원



